여행 및 답사

대구골목투어 - 근대로의 여행 4 (약전골목)

gold iris 2011. 3. 30. 01:11

뽕나무골목은 계산성당에서 동아쇼핑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이 골목 끝자락에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위암으로 사망 하실 때 까지 거주한 곳으로 2008년 복원 개관한 이상화 고택이 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대구 최고의 갑부였다는 서상돈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이(異)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문중에서 쫒겨나, 이곳저곳을 다니다 대구에 정착하여 지물행상과 포목상을 시작했습니다. 1886년에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고, 경상도시찰관에 임명되었는데, 대구교구의 발전을 위해 일하면서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07년 대구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국채보상을 제의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습니다.

서상돈 고택은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앞뒷집이었으나, 2004년에 헐려 전체적인 터는 조금 옮겨진 상태로 본채와 별채, 사랑채를 복원(2007)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인들이 건립한 종교계통의 건물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인 이상정 고택(이시우의 장남. 상화, 상백, 상오의 형)도 있습니다. 이상정은 오산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 투쟁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독립 운동가로, 윤봉길에게 폭약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서예가이자 대구상공회의소 전신인 대구상업회의소 초대 회장이었던 박기돈 고택, 구 제일교회 등이 있어 계산동 일대가 대구 근현대사의 애국지사와 민족의 혼이 살아있는 역사공간으로 조명 받고 있습니다.

100년 전 대구에서 가장 긴 골목인 성밖골목은 약전골목 왼쪽에 있는 골목입니다. 대구읍성이 축조될 당시인 1590년부터 철거되기까지 영남대로나 경부가도(京釜街道)로 불렸습니다. 약령시가 정착되면서 여관, 식당, 객주집 등이 들어서 약령시의 기능을 보완하고 있는 한약향기 가득한 골목입니다. 향이 아주 좋습니다.

이미자선생님의 친척이 운영한다는 홍익한의원에서는 약차와 떡, 오렌지를 대접받았습니다.

약령시전시관은 휴관일이었습니다. 그 앞의 조각은 약을 짜는 막대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